화순여행(백아산자연휴양림)
2024년 첫 여행지는 전남 화순이다.
2024년 1월 20일부터 21일까지 백아산자연휴양림 내 소나무 1호에 묵기로 한다
오후 1시경 출발하는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해 토요일은 계속 비가 내렸다
백아산자연휴양림은
백아산(약810m)은 6·25동란 때 빨치산 사단병력이 버티던 천연요새의 산이다. 무등산 동쪽, 차일봉~밤실산~모후산에 이르는 산줄기에서 잠시 벗어나 솟아 있는 이 산은 무등산은 몰론, 멀리 지리산 천왕봉까지 조망되는 시야가 트인 산이면서 산릉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산행의 재미 역시 대단하다
이 산 남쪽 자락에 조성된 백아산 자연휴양림은 휴양림 중 관리가 제일 잘 되고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이고, 휴양림에서 15분 거리에는 화순온천리조트가 있다. 또한 백아산 서쪽산록에는 가족단위 휴양모텔과 사계절 썰매장을 갖춘 백아산 관광목장이 있어 광주 광역시의 배후휴양지로 발전하고 있다.
- 백아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 내 자연휴양림 안내 중
백아산 자연휴양림은 타 휴양림과 달리 14시 입실이 가능하다
대신에 17시 이후에 입실할 경우에는 사전 연락이 필요하다
나도 4시 30분에 18시경에 입실 예정이라고 관리사무소에 알렸고, 체크인하러 가니 우리 방 키와 쓰레기봉투가 준비되어 있었다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소나무 1호 숙소는 당장이라도 등산로로 향해 백아산 정상으로 안내하는 듯하다
내일 아침 비가 멈춘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백아산 정상에 오르기를 마음먹는다
다음날 비는 멈추었지만 일찍 일어나지 못해 정상을 오르지 못한다
내가 마음먹어야 할 것은 정상에 오른다는 것인가?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숙소의 외관은 전형적인 휴양림의 모습을 보이지만 내부는 원목으로 벽체와 천정을 감싸서 깔끔하다
거실구간은 박공모양의 천장으로 일반건물의 천장보다 높아 개방감이 좋다
그리고 타 휴양림에서는 볼 수 없는 정수기,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헤어드라이기, 수건까지 제공한다
단지 두꺼운 요가 없어서 얇은요에 이불을 덧깔아서 사용했다
숲속의 집 소나무 1호는 6인실로 주말요금은 74,000원이다
다음날 일어나니 비는 그쳤고, 퇴실시간 전까지 백아산 정상을 다녀오기는 시간이 없어 주변 산책을 한다
백아산 등산안내도에서 백아산을 다음과 같이 안내한다
백아산은 백운산, 지리산과 함께 빨치산의 최강부대인 전남 빨치산의 본거지로 모든 빨치산 참가자들에게는 3대 성지로 추앙 받는 곳이다.
이곳은 위치상 광주, 전남의 중심지 일뿐더러 산세가 조밀하여 유격활동의 최적지인데서 6.25 전쟁 이전부터 유격전의 중심지였고, 입산 투쟁이 재개된 1950년 9월 28일 이후에는 이곳 곳곳이 요새 아닌 곳이 없었으니 용곡2구 약수마을에는 빨치산의 총수인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경북 봉화출신)이, 용곡1구 용촌마을에는 전남도당부가 있었으며, 수리에는 전남유격대 총사령부가, 원리에는 광주부대와 북면당이, 송단3구 평지마을에는 곡성군당부가, 송단2구 강례마을에는 전남도당학교가 있었다. 이 산속 곳곳에 발동기와 연자방아를 두어 탄약과 식량의 자급조달을 하였다고 한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이후 백아산을 중심으로 공비들이 출몰 민가로 부터 식량등을 약탈해감으로 공비소탕을 목적으로 국군 15연대 3대대를 주둔시키고 입산자 가족을 색출하여 아산국민학교에서 약 50명을 처형했다. 공비소탕과 공비들의 습격으로 인하여 1950년 6.25 이후 북면 거주 양민들은 국군주둔지로 피난하였는데 전체 면민 2,000세대의 70%인 1,400여 세대가 이서면 월산, 담양군 대덕면, 창평면, 고서면, 곡성군 오산면, 겸면으로 피난하였으며, 1950년 10월부터 1951년 4월까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밤에는 공비들이, 낮에는 아군이 주민들이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을 쌍방에서 학살하였는데 약1,0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51년 7월 20일경 안개낀 날씨를 이용 화순경찰서 2개소대와 광산경찰서 중대병력으로 죽기를 각오로 진격하여 고지를 탈환하고, 탈환한 고지를 지키기 위하여 타서에서 동원되어온 서남지구 경찰대(목포, 무안, 해남, 강진)와 노무원 480명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다음날 수 많은 빨치산들이 이들을 완전 포위 진격하여 480명 전부가 전사당하였다. 1951년 춘기공세로 이산의 진산(鎭山)인 마당바위가 위협을 받자 도당지휘부가 노치리 갈갱이 마을로, 전남유격대 총사령부는 노치마을로 옮겨 문바위에서 보름재와 차일봉에 이르는 토산능선과 중간지점인 삼각고지에서 곡성 매봉과 화순매봉에 이르는 능선과 계곡 등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군경의 토벌전이 불가능 했다. 51년 여름 백아산 토벌작전이 장기화 됨에 따라 군경합동연합본부는 광주 미 고문단과 협조 일본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 전폭기를 요청 공격하기로 결정을 보고, 광주 20연대 전남경찰국 1개대대, 화순경찰부대, 담양, 곡성 경찰대 연합으로 전폭기를 앞세워 수회 반복공격과 폭격을 가하여 대다수를 섬멸하였다. 이때 백아산 유격대는 미군 제트 전폭기를 격추하는 등 막강한 전선을 형성했으나 전폭기의 피폭을 받아 다수의 병력을 잃게 되자 1951년 11월 이곳에서 백운산으로 도당부를 옮겼으나 그 뒤에도 이 곳이 중심축이 되어 저항해 왔으며 2대 김선우 위원장(보성출신), 3대 박갑출 위원장(화순출신)등을 위시한 수많은 빨치산들이 55년까지 처절한 싸움을 전개해 온데서 이산을 첫 번째 요충지로 일컫는다. 백아산 토벌작전은 3년여의 세월을 소모했고 물자와 인명의 피해가 극심했던 전투였다.
- 콩닥콩닥설렘 화순8경 및 백아산 등산안내도 내용 중
안내도의 내용을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소설의 주인공인 고아리의 이름은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따서 지었다는 내용이 문 득 떠올랐다
이렇게 짧게 산책하고 아침밥 먹고 11실에 퇴실한다
쓰레기는 관리실 옆에 있는 분리수거장에 버리는데 관리하시는 분들이 친절하게 그냥 놓고 가라고 한다
참 감사하다
백아산자연휴양림에서의 숙박을 마치고 화순8경 중 하나를 향해 간다









